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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6.02.17 15:04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제2미시간, 그리고 등장.

2011년 겨울. 미시간이 3살을 눈앞에 두었을 때였다. 자연의 섭리란 것은 오묘하여서 사람이나 짐승, 풀 한 포기와 같은 만물은 한 해 두 해를 거치며 파릇파릇하게 자란다. 허나 이 섭리에서 미시간은 버림을 받았던 것인지,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쇠퇴하고 있었다. 다양한 원인이 겹쳐져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을 꼽아보면 부흥 카페 내에 존재하던 왕실 권문세족들을 쳐낸다는 창립 목적을 완수한 이후 미시간은 부흥과 거리가 멀어졌고 솔저의 재위기간에 미시간 수뇌부가 부흥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기로 결론을 내리면서 사실상 양 카페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변호사' 송군이 부흥을 통치하고 석과 장재호 등이 부흥에서 드문드문 활동을 이어가지만 미시간의 공식적 노선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대학에 들어가서 여자들의 뒷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쪽을 택하고 본인을 키워준 참잉여들의 은공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예테보리같은 악질 패륜아에 대한 반감이나 역사 공부는 등한시하고 게임만 해댄 미시간 잉여들의 지능 퇴화가 기타 요인으로 제기되고 있다.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 하나의 이유만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닌 것처럼 미시간과 부흥의 단절 역시 하나의 이유로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 이는 추후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2011년 겨울을 미시간과 부흥의 분열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해보이나 이에 대한 이견이 있는데, 잠시 뒤에 다루도록 하겠다. 

튜안 - 미시간은 부흥 최상류층의 비밀 결사였기 때문에 이들이 부흥 카페에서 활동을 하는 이상, 부흥과 활동의 궤를 같이 하는 운명공동체 커뮤니티였다. 여기에 부흥에서 성장한 새싹들을 선별, 소속원을 계속해서 보충할 수 있었기에 세대교체 문제에서도 자유로웠다. 문제는 부흥과의 단절이 미시간 소속 조직원들에게서 삶의 터전을 빼앗고 미시간 채팅방에만 박혀있는 진짜 백수잉여로 만들어 버린 것. 때마침 조직의 중진인 석과 장재호가 2011년을 전후로 입대했거나 입대할 예정이었으며 조직의 다음 후계자로 여겨졌던 예테보리는 여색에 빠져 조직을 버리고 인싸의 길로 도망갔다. 2011년 말 활동하는 고정인원은 해의시, 달의시, 뉴캐슬, 송군에 불과했다. 여러 번 조직 내의 내분으로 인해 이미 많은 소속원을 잃은 미시간에게 추가 이탈은 치명적 타격이었다. 때문에 미시간은 닉스의 옛 보금자리였던 몽상과의 통합이나 뉴캐슬을 매니저로 삼고 새로운 게임 카페를 설립하려는 시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속원을 보충하려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2011년 겨울의 미시간은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형국이었다.

이 때 나선 것이 해였다. 미시간과 부흥이 결별할 당시 미시간에서 부흥 지도층과 갈등을 빚은 사람은 홍잉과 해였는데, 홍잉이 2011년 중반을 기점으로 활동이 줄어들면서 해는 가장 강력한 반 부흥 노선을 견지한 인사였다.1 그러나 솔저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라던가 자신의 노선은 제쳐놓고 미시간을 살리는 것에 모든 힘을 쏟기로 한 해가 미시간을 살리기 위해 꺼내든 첫번째 승부수는 미시간을 다시 친 부흥 노선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 '부흥'이 아닌 친 '역사'로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부흥의 새로운 인물들을 받아들여 이전의 튜안 - 미시간 체제의 복원을 꾀한 것이다. 해는 부흥에서 활동하는 괜찮은 유저들을 이 시기에 데려왔다. 로키, 물의 백작, 라우티티아, 하드리아누스, 명랑호빗2 등 부흥에서 어느정도 학식이 있고 활동도 활발한 사람들을 점찍어서 데려왔다. 미시간이 워낙 폐쇄적인 성향을 가진 조직이기에 발아할 확률을 낮게 잡은 해는 부흥 바깥에서도 인재를 찾았다. 연개소문 카페의 사람들과도 접선했으며, 신장 카페에서 타카마츠님의 세력이 축출되자 이들과 접근하여 이들을 부흥에 자리잡게 하는 동시에 미시간의 사람으로 포섭했다.3 결과부터 말하자면 미시간의 역사카페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부흥 출신 인사들 대부분은 모두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후 사라졌으며 연개소문과 신장 소속 신규회원들 역시 같은 길을 밟았다. 오직 한 명의 회원만이 미시간에 적응을 하고 자리잡게 되었다.다행히도 해는 하나의 종목에 모든 자본과 시간을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시에 다른 종목에 분산투자를 해두었다. 

2012년 겨울에도 그랬고 2013년 겨울, 그리고 2015년 겨울에도 그랬지만 미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매년,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하나였다. '무슨 게임하지?' 해는 미시간의 학문적 요소 강화와 동시에 게임을 통한 친목 다지기를 꾀했다. 때마침 눈여겨보고 있었던 게임이 있었다. 바로 리그 오브 레전드, '롤'이다. 원래 해 본인은 일찍 롤을 해볼 기회가 있었으나 혼자 북미서버까지가서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기억 저 편에 묻어두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롤을 해보자고 권유한 것은 달님이었다.  미시간 최초의 롤 파티는 해, 달, 튜, 장 4인이었다. 만약 롤이 그대로 북미에서만 머물렀다면 이후의 일이 많이 바뀌었겠지만 롤은 국내에 상륙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해에게 있어서 롤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미시간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창구였다. 2012년 봄 해는 가장 먼저 김한다슬을 데려온 이후 뚜루버거, 미료, 황진원, 푸스터 등을 영입했다.5 해의 주도 하에 변화를 모색했던 4~5개월 동안 미시간에 새롭게 합류한 사람은 무려 3~40여 명에 이르렀는데, 역사계 뉴비들과 달리 디시(해외야구/마구마구갤러리)와 롤, 그리고 일베에서 단련된 게임계 뉴비들은 미시간의 분위기에 순식간에 적응하였고, 긴 시간 존속을 위협받던 미시간은 위기에서 벗어나 번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2미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해가 롤을 매개로 하여 데려온 이른바 게임계 뉴비들은 다시 크게 2가지로 나뉘어진다. 해가 해외야구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알게 된 사람들과 오로지 롤을 통해 알게 되어 데려온 사람들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해가 긴 시간을 알고 지냈기에 그 사람의 잉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다른 사람과 조화를 할 수 있을지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연령대가 어린 까닭에 미시간에 오래 활동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뉴비의 영입, 뉴비들에 대한 섬세한 A/S가 더해지면서 제2미시간은 사실상 해의 구상대로 운영된 체제였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완수르 '다이아수저' 김태완이 미시간에 등장한 것은 2012년 초였다. 미시간에 소속된 누군가에 의해 초대를 받아서 같이 5인팟6을 몇 번 했었던 완수르는 처음에는 해의 영입리스트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의 해는 롤을 같이한 사람에 한해서는 아주 미미한 연고만 가지고 있더라도 미시간으로 데려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렇지만 완수르는 헐첸과 함께 해의 초대를 자주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해에게 밉보이기 시작했고, 당시만 해도 게임 도중에는 과묵했던 완수르의 활동량을 의심했던 해는 최종적으로 두 사람을 단념하고 모조리 차단했다. 이렇게 완수르는 미시간의 역사와 무관해지는가 싶었지만,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해가 자리를 비웠을 당시 달의시가 완수르와 헐첸을 미시간에 합류시킨 것. 이는 과도기 미시간에서 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영입을 승인한 유이한 사례이다. 해가 저술한 롤유저열전, 속 롤유저열전 모두에서 완수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데, 지금은 활동이 뜸해진 부첵이나 군대로 간 영빈이도 서술된 것을 보았을 때 영입 이후 한동안 완수르는 존재감이 아주 희박한 쩌리짱 포지션이었다.6 2012년 여름이 되어서야 완수르는 미시간에서 어느정도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완수르가 발언권을 가지면서 뜻하지 않게 미시간 사람들은 완수르라는 낯선 뉴비가 실상은 낯익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시계바늘을 2010년으로 되돌려보자.

죽다, 카드, 죽다.


질문 하나. 8명 중 누구를 주목해야할까요?

2010년 10월 12일. 마구마구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10 KBO 카드들이 등장하는 업데이트을 예고했다. 엘리로 나온 이대호라던가, 혹은 무시무시한 타력으로 평가받은 10꼴과 같은 여러 셋덱들에 대한 호평도 많았으나 많은 LG계 덱 유저에게는 덱의 큰 약점이었던 포수 자리에 나오는 10 조인성 레어의 출시에 열렬히 환영했다. 다음날인 13일 업데이트가 진행되었지만 많은 LG 유저, 아니 모든 마구 유저들은 실탄은 충분하게 재여놓았지만 매물이 없어서 카드를 구매하지 못했다. 마구의 카드 판매 시스템8 때문에 실상 14일이 진정한 카드 구매 전쟁의 시작인 셈이다. 디시에 있는 마구마구 갤러리에는 카드를 정말정말정말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다수였고, 이들은 매크로를 통해 카드를 대리 구매해주는 사람들을 섭외하는 경우가 잦았다. 메츠와 트윈스를 너무나 사랑했던 어떤 유저도 돈은 철철 넘쳤지만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사람이었다. 2010년으로 되돌린 시계바늘을 조금 더 자세히 설정해서 그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아, 유저의 닉네임은 'Mets'다. 

룰렛이 돌아가고 있다. 지나가면서 보인 카드의 면면을 본 순간 Mets는 룰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룰렛의 종착지가 확정되는 순간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온 것에 환호성을 질렀다. 따끈따끈한 신상인데다가 덱의 핵심카드기 때문에 그 가격이 어디까지 오를지 가늠할 수 없을만큼 비싼 카드인 10 김강민을 뽑게 된 것. 김강민만 잘 팔면 추가된 10 LG 카드를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갤의 문화를 따라서 스페셜 한 장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 메츠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10월 13일 4시 1분). 큰 대박을 거둔 이후여서 그랬던 것인지 메츠는 손해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지고 조합 탭을 누르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룰렛이 이상했다. 사람의 피를 끈적끈적하게 만드는 BGM이 끝나가는 줄도 모르고 지켜보던 그는 전율하게 된다.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스러운 아이가 하나가 아닌 쌍둥이였던 것. 그렇게 그는 10김강민을 두 장째 먹게 된다. 6시 33분의 일이다. 메츠는 조흥운 조합을 찾아낸 갤러와 조흥운 조합에 희생된 야구선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잠시 표한다. 이로부터 3시간 뒤인 9시 33분에는 10 박정권까지 먹게 된다. 당시 시세로 500만 거니 이상을 5시간 사이에 벌어들인 셈이다. 그 날 메츠의 꿈 속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화사한 천국이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음날 다가올 참극의 형체조차도 모른 채로 잠을 청했다.

행복한 밤을 뒤로 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카드를 얻기 위해 나타났다. 상술하였던 것처럼 메츠는 자본은 충분했으나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10조인성을 구하기 힘들었다. 본인 역시 자신의 손으로 구매하는 것이 힘겨움을 토로하였다(14일 2시 32분). 그러나 이 시점만 하더라도 메츠는 매크로를 꼭 쓸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의 상한가가 얼마인지 확인하는 글을 쓰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14일 2시 47분 12초). 그런데 이런 완수르의 고민은 42분도, 4분 20초도 아닌 42초만에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게 된다. 



랑께는 스스로 필터링하자.

자신이 글을 쓴지 겨우 42초 뒤에 흑마신이라는 유저가 자신의 매크로를 통해 10 조인성을 매크로 가동 이후 30분이 되지 않았는데도 구매했다는 글을 올린 것이다. 멀쩡한 갤러도 혹할만한 글의 내용이었으니 조인성에 몸이 달아있던 메츠가 이 글을 보자마자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글에 달린 10개의 리플 중에서 절반인 5개를 메츠 혼자 달았던 것은 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메츠의 구애는 리플에만 그치지 않았고 2개의 글을 더 썼다(14일 2시 52분/14일 2시 54분).








14일 3시 4분. 흑마신은 메츠가 신청한 10 조인성, 설록차라는 유저가 신청한 10 김광현을 먹어주기로 하였다. 다만 순서는 김광현이 먼저였다. 자신이 후순위로 밀린 것에 대해서 메츠는 아쉬움을 표시하며 얼른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14일 3시 17분). 만약에 흑마신이 설록차의 김광현이 아닌 메츠의 조인성을 먼저 매크로에 설정했더라면 이후 일어날 일들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의 영역일 뿐이다. 이로부터 4분 뒤인 3시 21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7분과 21분 사이의 4분 동안에 지금은 삭제되고 없는 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갤러리에서는 이 글이 남아있었다는 대화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리플의 내용으로 보아 삭제된 글의 글쓴이는 흑마신의 사칭으로 고정닉 마크를 달고 있었으며 매크로를 돌리고 있으니 갤로그 방명록에 아이디와 비번을 남기라는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인다(이후 참마신과 짭마신으로 기술). 조인성에 눈이 먼 메츠는 이 고정닉 마크를 확인하지 못하고 짭마신의 갤로그에 아이디와 비번을 남겼다. 정작 이 순간 참마신은 설록차를 위해 매크로를 돌리고 있던 중이었기에 순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느 대통령의 7시간처럼 그 4분 사이에 메츠의 운명은 정해지고 말았다.


3시 24분. 메츠는 자신의 아이디가 초토화된 것을 확인했다.9 

위에서 추정한 것처럼 17분에서 21분까지 4분 사이에 덱이 모조리 조합당한 것으로 보이며 길더라도 1분 이상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행시간은 5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후 메츠가 피해내역을 공개했는데(3시 32분), 타자 레어 12개 스태프 레어 6개 투수 레어 6개10였다. 범인이 레어를 스페나 노말을 섞어서 돌리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시간 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9개의 레어를 한꺼번에 넣고 돌려버리는 방식으로 아이디를 붕괴시켰다면 1~2분만으로도 간단한 일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한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범행이 간단하고 짧을수록 잡기 힘들어진다고. 범인에게 속은 사람이 메츠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똑같이 10조인성을 구하고 있었던 콤보맨이라는 갤러도 있었는데, 그 역시 범인의 갤로그에 아이디와 비번을 남겼다. 이 쪽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3시 27분), 참마신이 등장하면서 짭마신이 허겁지겁 도망가서였는지 아니면 한 사람의 아이디를 폭파하는 것에 짭마신이 만족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사건은 그 날 마갤을 폭발시킨 대형사건이었다. 많은 갤러들이 있는 갤러리답게 가지가지의 반응이 나왔는데 이런 놈이 있는가하면 저런 놈도 있었다. 더욱 메츠를 비참하게 하는 것은 참마신에게 김광현을 의뢰한 설록차(3시 54분)과 정원석을 의뢰한 칰올러(4시 7분)은 원하는 카드를 다 먹었다는 사실이다. 참마신은 메츠를 위해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다 털린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련의 과정에서 당시 갑 클랜 소속이었던 해, 달, 튜는 이 메츠란 유저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긴 한편, 하루의 유용한 이야깃거리로 잘 써먹었다. 1년하고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어떤 사이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후 메츠는 사이버수사대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문의했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고(4시 18분), 짭마신이 참마신을 사칭했으니 사칭 문제로 신고하려 참마신과 공조하였으나 그 역시 마구마구와 사이버수사대에게서 부정적인 답변을 듣게 된다(4시 50분).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메츠가 마갤에 다시 글을 남기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은퇴한 그가 돌아오자 많은 갤러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무려 22시간만의 일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메츠의 성은 김이요, 이름은 태완이다.

완수르 In LoL

미시간이 롤에 모든 사활을 걸었던 시기에는 개인의 티어가 높거나 롤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수록 해당 회원이 미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완수르가 미시간 초창기 입지가 약했던 것은 낮은 티어와 롤에서 그리 실력파가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두 번의 열전에서 모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미시간 내에서 완수르의 입지가 탄탄해진 것은 롤에서 완수르가 보여주는 모습이 변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롤을 떼어놓고서는 완수르를 설명할 수 없다.

유저 아이디 : 인생은박주영같이 外
칭 : 라뱅, 완수르 
주요 포지션 : 정글, 미드, 탑 
주요 챔피언 : 리신, 트페 

변화의 진동을 가장 빠르게 느끼는 유저

처음부터 완수르가 뛰어난 유저가 아니었음은 위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메타의 변화를 감지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새롭게 떠오르는 챔피언을 일찍 연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미시간의 다른 유저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있다. 멀티 포지션 능력이 뛰어난데, 정글러와 미드라이너로 갈 경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며 탑라이너로도 종종 올라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봇듀오로 갔을 때는 그 존재감이 다른 곳에 갈 때보다 못한데, 미시간팟에서 서포터는 거의 하지 않으며 원딜은 라이너 경쟁에서 밀렸을 때 아주 불만스러운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이며 가곤 한다. 포지션에서 그의 유틸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챔피언에 있어서도 아주 넓은 폭을 자랑한다. 메타에 따라 바뀌는 챔피언의 흥망성쇠에 맞춰 본인 역시 그를 연습하고 좋은 템트리를 연구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보여주고있다. 옥에 티가 있다면 메타가 바뀔 때마다 그의 결제내역의 숫자가 계속해서 올라가며, 스킨 목록의 업데이트가 자주 이뤄진다는 점이다.

정글러를 주 포지션으로 삼는 유저들은 맵리딩과 피지컬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데, 완수르 역시 두 가지 면에서는 뛰어난 장점을 보여준다. 가장 즐겨하는 챔피언인 리신은 완수르의 장점을 잘 살리는 픽으로 정글러 완수르, 서포터 해가 있을 경우 미시간팟은 시야싸움에서는 상대편에게 뒤쳐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험이 쌓여가면서 게임 시야 또한 매우 넓은 편인데, 미드 트페를 시그니처 픽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떤 정글 픽이나 어떤 미드 픽을 하더라도 맵을 크게 쓰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야구 응원팀처럼 신바람롤을 하다보니 허파에 바람이 차는 순간 뒤의 아군도 보지 않고 앞의 적군도 보지 않는 경우가 잦다. 오직 음파에 맞은 상대만을 향해 Q버튼을 다시 누를 뿐이다. 이 때문에 전국을 휘어잡고 아군을 유리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패배를 아군에게 가져다준다. 또한 승기를 잡은 게임에서는 맞지 않는 아이템을 산다거나 매우 위태로운 플레이를 선보이다가 잘리거나 1:1로 덤비다가 죽는 등 김XX슬, 이X호, 김X민 등에 가려져 있지 그 빈도가 만만치 않은 악질 트롤러 중 하나다. 이런 문제점들은 대체적으로 완수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허영심과 과시욕이 부른 부작용이다. 물론 다이아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바람에 챙겨야할 인성은 챙기지 못한 완수르의 선천적 결함이 큰 요인이지만 미시간 롤을 통해 발생한 후천적 요소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이와 반대로 친 부흥 노선을 표명한 것은 송군이었다.
2 그 유명한 '두 명의 이유섭' 사건의 주인공이다. 이는 기회가 된다면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3 타카마츠님은 부흥의 존중받는 논객 정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기실 영입 과정에서 타카마츠님을 본의아니게 속인 셈이 되었는데, 이 글을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4 이 시기 해는 혼자서 영입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정작 다른 회원들은 이런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해가 미시간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안 조직의 중진이라는 이가 폰트에 색깔이나 입히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결여된 인성이 드러나는 부분인 동시에 미시간과 부흥을 다시 연결하려는 해의 계획이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반증인 셈이다. 
5 개든은 이때보다 약 1년 정도 전에 영입되었는데 영입 직후에는 정작 적응하지 못하고 잠수를 했었다.
6 김한다슬이나 호갱이 5인팟에 초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7 뒷날 완수르가 미시간 정계의 핵심으로 떠오른 이후 해에게 자신을 찬양한 일대기를 쓰지 않으면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한 것을 미루어보아 이 당시의 무관심은 지금의 관종 완수르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8 발매 당일에 카드를 팔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
9 이 글은 조회수가 1000이 넘었는데, 그 날 가장 많은 조회를 기록한 게시글이었다.
10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상훈 스페는 남아있었다.


분류없음 2014.09.30 00:44

약체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캔자스시티라는 이름. 유니폼 디자인은 별다를게 없지만 같은 블루임에도 다저블루의 짝퉁으로 여겨지던 로열블루. 간손미처럼 언제나 함께할 줄 알았던 템파베이와 워싱턴, 피츠버그가 차례차례 의리를 저버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가슴아팠던 시절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곱게 접어두고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이란 곳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63번째 게임을 펼치고 2014년을 마무리할 지, 아니면 구장 한가운데에 2014가 찍혀있는 왕관 간판을 달게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의미있었던 162게임, 2014시즌을 부족한 능력이나마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시즌 MVP 


Alex Gordon(.266 .351 .432 19HR 34D 74RBI WAR 6.6)



시즌 막판 대부진(.183 .330 .268 1홈런 11타점) 때문에 약간 빛이 바랬지만 올시즌 로열스의 공격을 이끈 선수는 당연히 알렉스 고든입니다. 사실 다른 팀의 타선의 축을 이루는 선수들에 비하면 모자라 보이는 공격력(.266 .351 .432 19홈런 74타점)이지만, OPS의 첫 숫자가 8을 찍는 선수가 없었던 올시즌 로열스를 고려해본다면 저 스탯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호스머, 무스타카스, 버틀러 등이 모두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는 와중에서 기록한 득점권 성적을 본다면(.338 .438 .592 7홈런 58타점) 그야말로 2014 극한직업 로열스 외야수편을 찍었다고 봐도 될 수준이죠.


시즌 중반부터 고든 MVP설이 힘을 얻은 것은 고든이란 선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스탯인 WAR이 개인수상의 지표로 각광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든은 WAR 탑10에서 OPS가 가장 낮습니다(9위 조시 도날슨 7.4). 대신 포지션을 바꾼 이후 최고의 수비수라는 찬사에 걸맞게 이번 시즌에도 UZR 21.9를 기록하며 메이저 좌익수 중에선 가볍게 1위를 차지했으며(2위 옐리치 12.9), 외야수로 범주를 확대한다면 헤이워드(25.3)에 이은 2위를 기록했습니다. 고든으로부터 시작하는 강력한 수비진은 캔자스시티의 최대 강점으로, 팬그래프가 제공하는 Def 지수에서 70.6점으로 30개팀 중 1위를 차지할만큼 견고했습니다.


이외에도 투수 WAR 1위를 차지한 웨이드 데이비스(WAR 3.8)와 올시즌 드디어 투구에 눈을 뜬 더피(3.6), 시즌을 탈없이 잘 보내준 케인(5.1) 정도가 MVP로 거론될만한 선수들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첨언하자면 영리한 주루, 견고한 수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14 로열스를 상징하는 선수인 다이슨을 숨겨진 MVP로 뽑고 싶습니다. 다이슨은 딱 260타수만 뛰고 2.8 WAR을 기록했습니다.


실망스러웠던 이


Billy Butler(.271 .323 .379 9HR 32D 66RBI WAR -0.3)


뚱뚱한 몸을 이끌고 2루로 열심히 뛰어가며 51개의 2루타를 쳤던 09시즌. 생애 처음 100타점을 넘기며 영광스러운(그리고 카노의 기분을 처참하게 만들었던) 올스타에 뽑혔던 12시즌. 스위니 이후 가장 위력적인 타자였던 버틀러는 지난 시즌 OPS 8선이 무너졌고 올해는 커리어 최악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만약 시즌 마지막 일주일이 아니었더라면 OPS 6할대를 기록했을테죠. 올시즌의 부진이 걱정스러웠던 것은 출루와 장타가 동시에 무너진건데요(13시즌 출루 .374/장타 .412).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닌 버틀러에게 반등이 가능할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덕분에 올시즌이 끝난 후 1250만 달러의 팀옵션은 캔슬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팀에게도 버틀러에게도 서로가 보내온 시간들이 애틋하기에 버틀러에게 1년정도의 단기계약을 통해 재기의 기회는 주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2015년은 어떻게 될까요?


이 팀에서 좌타 3루수의 성공은 불가능하다는 주제의 논문을 위해 협조중인 무스(.212  .271 .361)정도가 버틀러와 겨뤄볼만했습니다만 그래도 수비수로 뛰는게 미세하게나마 팀에 기여가 되긴 되었습니다.


최고의 무브


Jason Vargas(11승 10패 3.71 187이닝 WAR 2.5 : 4년 2800만달러)


처음 바르가스를 데려왔을 때는 좀 아쉬운 느낌이 있었죠. 직전 시즌이 다소 부진했기에 2800만달러라는 총가격보다 4년이라는 기간이 주요한 아쉬움거리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14시즌만을 놓고본다면 바르가스는 팀의 3선발 역할을 충준히 해줬습니다. 로열스 로테이션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쉴즈 - 거스리 - 바르가스로 이어지는 베테랑 3인방이 모두 알아주는 이닝이터들이란 점인데, 14시즌에 이들은 616.2이닝을 소화해냈습니다. 자연스레 불펜이 맡을 이닝이 줄어들기에 마운드 운영에 있어서 강력한 이점을 얻었습니다. 요스트가 이 강점을 제대로 활용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만요.


중간에 들어와서 아주 쏠쏠한 활약을 해준 프레이저(3승 1.53)가 돋보였습니다. 후반기만큼만 해줬으면 좋았을 아오키나 영입 후 타선의 무게감을 확연히 바꿔주었으나 부상으로 몇 경기만에 휴업에 들어간 윌링햄 등은 2% 모자랐네요.


최악의 무브


Bruce Chen(2승 4패 7.45 48.1이닝 WAR -1.1 : 1년 300만달러)


오래 전에 땜빵 비슷한 역할로 메이저에서 패전처리 역할을 맡던 선수가 다시 기회를 잡고 던질 때에는 이 선수가 메이저 선발등판 1위(12시즌 34선발)를 기록할 것이라고는, 6시즌동안 로열블루 유니폼을 입게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807이닝을 던졌던 브루스 첸은 2014년 9월 5일 방출될 때까지 718.2이닝을 로열스에서 던졌습니다.


13시즌의 깜짝 활약(9승 4패 3.27)은 장고 끝에 무어가 다시 첸에게 손을 내밀기 충분했지만 36살의 브루스 첸은 상대하는 타자를 알투베의 컨택과 바티스타의 파워를 가진 선수로 바꾸는 기적의 핵실험을 마운드에서 행했습니다(.343 .389 .522). 핵실험은 뉴멕시코에 가서 해야한다는 것을 무어는 곧 알아차렸고, 그렇게 6시즌간 정들었던 라커룸을 브루스 첸은 비우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선수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괜찮은 선수였다곤 말해줄만큼의 성적을 남기구요.


분류없음 2014.03.12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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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창한 제목을 지었습니다만, 이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수단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을 정리해본 조잡한 글임을 밝힙니다. 접근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실 수 있음을 알려드리나 시간에 대해선 장담을 하지 못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아직 미숙하여 특출한 지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사실 여부와 다른 이야기가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시엔 지적을 해주신다면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순 서대로 나가는 것이 가장 무난해보여, 첫째 노부야스를 먼저 하기로 골랐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후계가 계승되지 못하였는데, 오히려 딸의 가계를 쫓아가는 것이 더더욱 어려움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시집간 가문을 통째로 다뤄야해서 말이죠. 덕분에 장편의 글로 변경되어버렸으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노부야스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들을 가지지 못하고 두 딸이 있었는데, 토쿠히메(登久姫 : 호코인 峯高院)와 쿠마히메(熊姫 : 묘코인 妙高院)가 그들입니다. 오늘은 토쿠히메와 그녀의 자손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그녀의 남편인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얘기를 하기 전에 오가사와라 가문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듯 합니다.

삼층마름

오가사와라 가문은 본디 가이 미나모토씨의 서류로1 유 서깊은 가문이었습니다. 가이 미나모토의 일원들은 가이의 고을 이름을 따라 성씨가 정해졌는데 오가사와라 가문의 가조인 오가사와라 나가키요(小笠原長清 1162~1242)는 고마군의 오가사와라향에 자리잡아 처음으로 오가사와라라는 성씨가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2 나가키요는 지쇼-쥬에이의 난3을 통해 중요한 군공을 세웠고 시나노에 영지를 받았으며, 아와 슈고4로 임명됩니다. 오가사와라 3대 당주인 나가타다의 대에 이르러 시나노 본국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게 됩니다. 이에 나가타다의 동생 나가후사가 아와 슈고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는데, 그의 가계를 아와 오가사와라씨라고 합니다.56 

아와 오가사와라 가계도

가마쿠라에서 무로마치로 넘어가는 시대에 오가사와라씨는 아시카가씨를 지지합니다. 이는 옳은 선택으로 판명되었고, 다카우지는 시나노에 세력을 두고 있던 오가사와라씨의 당주 사다무네를 시나노의 슈고로 임명합니다.7 이 것은 호조 일가가 1203년부터 1332년까지 130여년간 시나노 슈고의 지위에 있으면서 시나노를 호조의 기반으로 닦아놨기에 시나노에 오래 기반을 두고 있던 오가사와라씨를 중용해 시나노를 다스리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4대 싯켄인 호조 다카토키의 유아인 도키유키가 하필이면 시나노의 스와씨에게 몸을 의탁하며 오가사와라 가문의 수난이 시작됩니다. 스와씨와 시게노씨를 중심으로 도키유키를 옹립한 호조 부흥군과의 아오누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정은 시나노의 통제권을 상실합니다. 이 아오누마 전투은 뒷날 나카센다이의 난이라고 이름붙는 중요한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리나가 친왕의 묘)

당시 시나노 고쿠진8들이 주력이 된 부흥군은 가마쿠라를 점령하기에 이르러 쿄에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9 그러나 다카우지의 신속한 대처로 부흥군은 진압되며 나카센다이의 난은 사실상 종료됩니다.10 가마쿠라가 무너진 후 남조와 북조의 대결구도에서 오가사와라는 북조에 속해있었는데, 시나노 기쿄가하라에서 남조의 무네요시 친왕이 이끄는 시나노 고쿠진 군대를 대파하는 큰 공을 세워 이전의 실책을 모두 만회하였습니다. 11오가사와라씨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중추에 근접해있던 호코슈의 일원이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아 후대받는 가문이었으리라 추측이 가능합니다. 12 

시나노 슈고의 자리는 바로 돌아오게 됩니다만, 문제가 생깁니다.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쿠보13 사 이의 마찰이 빚어진 것이지요. 가마쿠라에서는 시나노에 대한 통제권을 내세워 9대 당주이자 당시 슈고였던 오가사와라 나가모토를 해임, 간토간레이인 우에스기 도모후사를 시나노 슈고로 임명합니다. 시나노는 간토로 들어가는 곳 중 하나로 가마쿠라의 통제권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막부로써도 시나노를 눈뜨고 넘겨줄 수는 없는 일. 나가모토에게 병량료소에 대한 관리권한을 부여합니다. 병량료소는 헤이안 말기에 시작되어 그 당시까지 활용된 것으로 전시에 병량미를 징수할 수 있는 영지를 말합니다.14 이것은 나가모토에게 시나노의 군권을 유지시켜 균형을 지킨 것입니다. 시나노 슈고 임명권이 가마쿠라에서 다시 무로마치로 넘어온 것은 1377년의 일이었습니다.15 그 런데 시나노 슈고 자리는 오가사와라씨가 아닌 시바씨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시나노 슈고로 임명된 이는 간레이인 시바 요시마사의 남동생인 요시타네였습니다. 요시타네는 시나노로는 내려가지 않고 자신의 가신인 니노미야 우지야스를 슈고다이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지야스 역시 아들인 다네우지를 대관으로 삼아 파견합니다(..) 다네우지는 현재의 나가노시에 슈고의 거처를 두고 시나노에 대한 지배권 확립에 나섭니다.

이 당시 타카이군을 중심으로 고쿠진 사이에서 충돌이 잦았는데, 이치카와씨와 다카나시씨의 대립이 첨예하였습니다. 이치카와씨는 간오의 난16때 다다요시를 지지했었으며, 이때문에 다카우지파였던 오가사와라씨와 다카나시씨와 일찌기 대립하였고, 우에스기씨의 힘을 빌어 다카나시씨를 물리친 적도 있었지요. 추가 다카우지쪽으로 기울자 이들은 오가사와라씨에게 얼른 항복을 해버립니다. 이로 인해 북 시나노에서 이치카와씨의 존재는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런 이치카와씨는 생존을 위해 철저히 친 슈고적인 행보를 이어나갑니다. 이로 인해 다카이, 미노치, 사라시나의 3군에 걸친 북 시나노의 강력한 고쿠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386년 슈고다이의 명령을 듣지 않은 죄로 다카나시씨의 영지에 대한 처우를 인접한 이치카와 요리후사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차가 오히려 시나노 고쿠진들의 반발을 물러일으켜 무라카미·오가사와라·다카나시·나가누마(시마즈라고도 합니다) 연합해 궐기합니다. 이들 고쿠진 군대는 니노미야와 이치카와 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며 시나노 슈고의 통제권 상실을 가속화시킵니다. 이 시기 북 시나노의 고쿠진 수장은 무라카미씨였으며, 남 시나노는 오가사와라씨가 으뜸가는 고쿠진이었습니다. 시바군은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엔 시바 다네우지가 해임당했으며17, 막부 간레이인 요시마사가 시나노 슈고 자리를 맡는 초강수를 둠에도 고쿠진과의 대립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이 에 쇼군 요시미쓰는 시바씨에 의한 시나노 슈고 통치를 마무리하고, 가장 강력한 고쿠진이었던 오가사와라씨를 슈고로 삼아서 시나노 통제에 나서게 됩니다. 이 해가 1399년으로 33년 만에 오가사와라씨에게 시나노 슈고 자리가 돌아오는 셈이었습니다.  요시미쓰는 나가모토보다도 자신을 가까이서 모신 나가모토의 아들인 오가사와라 11대 당주 나가히데를 슈고에 임명합니다. 이는 이듬해에 오오토 합전(大塔合戦)으로인해 대단한 패착으로 밝혀집니다. 

시나노의 역사에서 오오토 합전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오누마 전투를 시작으로 시나노의 고쿠진들에 대한 제어는 날이 가면 갈수록 힘들어졌습니다. 가마쿠라 쿠보도, 시바씨도 이에 실패했습니다. 오가사와라씨의 슈고 재임용은 승부수였던 셈이지요. 오오토 합전은 시나노 슈고의 최종방어전이었습니다.



  1. 가 이 미나모토씨의 시작은 미나모토 요시키요(1075~1149)입니다. 원래 요시키요는 히타치의 다케다를 자신의 영지로 삼고 다케다를 성씨로 삼았습니다만, 히타치 내에서의 마찰로 인해 장남인 기요미쓰와 함께 가이로 유배됩니다(요시키요와 히타치에서 싸운 사람은 요시키요의 형인 요시나리로 재미있게도 사타케씨의 가조입니다). 이것이 가이 미나모토씨의 출범인 셈이지요. 이후 자손들은 가이 각지로 흩어져 분가를 세우는데 다케다. 가가미, 헨미, 아키야마, 난부 등이 있습니다. 오가사와라는 이중 가가미씨의 서류입니다.
  2. 오가사와라향은 현재의 야마나시현 호쿠토시나 남 알프스시로 추정.
  3. 겐페이합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4. 시코쿠의 아와. 
  5. 1267 년 다이라의 잔당을 토벌한 공으로 미마군과 미요시군을 중심으로 한 영지를 포상으로 받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아와 오가사와라씨는 아와 슈고의 자리에 있었는데, 나가후사의 후손 중 미요시군을 다스린 이들이 바로 뒷날의 미요시씨입니다.
  6. 아와 오가사와라씨의 일부는 원의 침공 때 군공을 세워 이와미에 영지를 받습니다. 이들을 이와미 오가사와라씨라고 합니다. 
  7. 본디 삼층마름은 가가미씨의 카몬(가문의 문장)이던 삼층마름을 오가사와라 가문의 카몬인 삼층마름의 등장시기가 이 사다무네의 시기라고 합니다. 王자를 하사받아 카몬을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몰래 王자를 보고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8. 호족정도로 해석하시면 되겠습니다. 
  9.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숙적 중 하나인 모리나가친왕(護良親王)이 이때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명에 의해 살해됩니다. 
  10. 이로부터 17년 뒤인 1352년 도키유키는 사로잡힌 후 처형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무리합니다. 
  11. 기쿄가하라의 전투는 매우 극소수의 기술만이 남아있어 전투가 있었는가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12. 오 가사와라 사다무네의 동생인 사다나가는 이때 닛타 요시사다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사다나가의 아들인 나가타카는 이에 시나노가 아닌 교토로 가서 궁마 사범을 하게 되면서, 가계를 잇게 되었습니다(이를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다나가계 오가사와라씨를 교토 오가사와라씨라고 부릅니다. 
  13. 교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간토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한때는 간토 전역과 오슈까지도 관리했습니다.
  14. 남북조 말기에 격화된 상황에 이르면 슈고들이 독단적으로 병량료소를 여기저기 설립하는 폐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5. 1377년에 우에스기 도모후사가 막부의 명령을 수행한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서 막부에 넘어간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16.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 형제가 대립했던 남북조 시대의 내분. 
  17. 친 슈고 세력이었던 스와씨가 남 시나노에서 오가사와라씨를 무찔렀으나, 이는 친 슈고와 반 슈고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영지 방어 개념의 교전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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